<세종조의 율관 및 악기제작>
세종조의 아악정비는 올바른 율관제작과 그 율관을 근거로 한 악기제조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율관제작과 악기제조 없이 아악정비는 불가능하였다. 마침 1425년(세종7) 해주에서 율관제작에 필요한 기장 알갱이 및 남양에서 편경 제작을 위한 경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율관제작과 악기제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악기제조를 위해 악기도감과 주종소가 설립되었고, 율관제작을 위해 악학별좌인 박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 박연의 율관제작
박연은 1425년 해주에서 발견한 기장 알갱이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율관제작을 시작하였다. 기장 알갱이 하나의 폭을 1푼으로 삼았고, 10개의 알갱이 길이를 1촌으로 삼았으며, 9촌을 황종율관의 길이로 삼아서 황종척을 만들었다. 1차로 만든 황종율관의 음높이가 중국 명나라에서 보낸 편경의 황종음보다 높았으므로 그 황종율관은 악기제작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박연은 1427년(세종9) 9월 황종음을 내는 중국 편경이나 편종을 표준으로 삼아 2차로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이렇게 2차로 제작한 12율관을 근거로 12매 짜리 편경 한 틀을 만들어 세종대왕께 헌정하였다.
그러나 2차 율관제작에 만족하지 않은 박연은 1430년(세종12) 2월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세종대왕에게 올리고, 남쪽지방에서 생산된 기장을 가지고 3차 율관제작에 들어갔다.
(세종 12년 2월 19일 : 경인) 지난번에 해주의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하였을때, 그 황종음이 중국의 편경보다 높았는데,
그 원인은 땅이 메마르고 날이 가물어서 기장 알갱이가 작았던 까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알갱이가 굵은 남쪽지방의 기장 알갱이를 대중소(大中小) 세 가지로 나누어,
세 가지 기장 알갱이를 사용한 세 황종율관을 만들어 그 중에서 중국의 편경과 맞는 율관을 골라서,
그것을 삼분손익하여 12율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율관을 만드는 일이 지금 제일 급선무이오니, 영
단을 내리시어 곧 시행하도록 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면,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1430년 2월에 시도한 박연의 3차 율관제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는지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세종실록』에서 더이상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2) 악기도감과 주종소
(1) 악기도감의 악기 제조
나라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 임시로 세운 관청이 악기도감과 주종소였다. 1차 율관제작이 시작된 1427년(세종9) 이전인 1423년(세종5)에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였다. 즉 당시 전악서와 아악서의 악기가 부족하여 금, 슬, 대쟁, 생, 봉소를 제작하여 두 음악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그 이듬해(1424) 11월에도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악기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음률이 맞지 않거나 부서진 기존의 악기를 수리하였다. 1424년 11월에는 생21, 화14, 우15, 금8, 슬10, 대쟁3, 아쟁3, 가야금2, 거문고2, 당비파2, 향비파2, 이상의 악기가 악기도감에서 제작되었고, 또한 봉소, 약, 훈, 지를 개수하였다.
아악정비를 위한 아악기 제조는 1430년(세종12) 9월 박연이 악기감조색의 설치를 상소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악기제작 이전의 악기 상황이 매우 열악하였음은 아래에 인용된 실록의 기사에 분명히 드러난다.
(세종 7년 8월 임진) 예조에서 아뢰기를, "제향에서 사용되는 악기 중에서 석경은 중국에서 보내준 한 틀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와경입니다.
지금 경기도 남양에서 나오는 돌의 소리가 좋습니다. 옥 다듬는 사람을 보내어 캐가지고 와서 옛 제도대로 시험하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25년(세종7) 당시 석경이 한 틀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흙을 구워서 만든 와경이었다는 예조의 상소문은 세종 초기 아악기의 상황이 매우 열악하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석경 한 틀은 1406년(태종6) 명나라 영락황제가 조선사신 박린과 김희를 통해서 보낸 편종1, 편경1, 금4, 슬2, 생2, 소4에 포함된 그 편경이었을 것이다. 아악기의 중요한 편경과 편종이 이 지경이었기 때문에, 악기도감과 주종소의 설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427년(세종9) 5월 악학별좌 박연의 감독 아래 제작된 석경 12매 한 틀은 명나라 영락황제가 보낸 편경의 황종에 맞춘 것이다. 이렇게 남양의 경석으로 편경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427년 5월 이후부터이다. 종묘와 영녕전 및 다른 제사때 사용할 편경과 특경을 위한 경석 528매가 1428년(동왕 10) 여름까지 악기도감에서 제작되었다. 경석 528매는 16매짜리 편경 33틀을 만들 수 있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1428년부터는 새로 만든 편경이 종묘, 사직, 풍운뢰우, 선농, 선잠, 우사, 문선왕묘 등의 제례악 연주때 사용되었다.
(2) 주종소의 설립과 편종 제작
편경과 그 이외 악기제작은 악기도감에서 가능하였지만, 편종제작은 다른 악기제작에 비해서 제작 공정이 까다롭고 어려웠다. 그러므로 악학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올린 예조의 상소문을 전하는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 11년 2월 갑신) 예조가 악학의 보고에 의하여 상소하기를 "옛 사람의 종을 주조하는 법은 구리와 주석을 일정한 중량의 비율로 배합하는데, 이를 일러 제가 있다 하온데, 이는 더하든지 덜하든지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주조한 편종은 다만 중국에서 악기를 줄 때 온 편종에 의하여 주조한 것으로서,
구리와 주석의 중량비율이 능히 법대로 배합되지 못하여, 소리나는 것이 맑고 고르지 못하오며, 또 음률이 잘 조화되지 아니하옵니다.
(중략) 청컨대 주종소를 설치하고 법식대로 주조해 [편종을]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다.
1429년(세종11) 2월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편경의 경우처럼 주종소의 설립 이전에 편종은 명나라 영락황제가 보낸 편경에 의거하여 제작되었다. 1429년에 설립된 주종소에서 새로 제작한 편종을 악학제조 유사눌이 1430년(세종12) 7월 세종대왕께 헌정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악학별좌 남급이 조회에서 사용할 편종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1431) 회례연에서 사용할 편종을 주종소에서 제작하였다.
주종소에서 편종을 제작할때 관여한 신하는 영악학 맹사성, 악학제조 유사눌, 악학별좌 박연, 그리고 군기판관 정양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음악이론과 역사연구를 전담한 악삭 소속의 관리였다. 그러므로 음률에 조예가 깊었던 이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 주종소의 편종제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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