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대성아악의 등장으로 고려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12세기 이전에는 향악과 당악이 고려음악사의 주류였으나, 12세기 이후로는 아악이 고려음악사의 새로운 갈래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12세기 이전 동안에 송나라와의 문화교류는 당악기와 교방악의 수입이 주축이었다. 그렇지만 송나라의 휘종이 1114년 신악과 1116년 대성아악을 고려조정에 보냈기 때문에, 양국 사이의 문화교류가 절정을 이루었다. 1114년의 신악은 위한진이 음악을 완성하기 이전의 신악이고, 1116년의 대성아악은 위한진이 완성한 신악이다.
송나라 휘종의 고려조정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순수한 문화교류 차원을 넘어선 고도의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즉 발해의 멸망 이후에 만주지방에서 건국된 거란족의 요나라와 12세기부터 세력을 확장한 여진족의 금나라와도 고려는 외교관계를 맺어야 할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왕조의 외교적 확장을 의식한 휘종이 일종의 정치적 뇌물로 보낸 선물이 신악과 대성아악이라는 것이다.
<대성아악의 수용과정>
1) 대악아악의 제정 경위와 특징
(1) 대성아악의 제정 경위
대악의 큰 뜻을 품은 송나라의 휘종은 쇠퇴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하여 음률에 밝은 위한진의 도움으로 대성악을 창제하였다. 대악 정비의 뿌리가 될 음률을 결정할 때, 위한진은 황종율관의 길이를 휘종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삼았다. 1105년 위한진의 새로운 음률에 의한 신악이 연주되었을때, 휘종은 신악에 '대성'이라는 글자를 붙이도록 함으로써 대성악이 등장하게 되었다. 휘종때 창제된 대성악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서 연주되면서 대성악이라고도 표기하였기 때문에, 한문표기 상의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와 더불어 휘종은 악제개혁을 단행하여 태상시에서 관장하던 예와 악을 분리시켰다. 즉 예는 종전대로 태상시에서 관장하였으나, 악은 새롭게 설립한 대성부에서 관장하였다. 이런 경위로 제정된 대성악은 제대로 전승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간신들 때문에 혼란해진 송나라가 결국 요나라의 세력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조정에 보낸 대성아악은 고려음악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후에 세종조에 새롭게 정비되었다.
(2) 대성아악의 특징
대성악이 제정되자, 휘종은 유병에게 대성악의 이론을 정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유병의 「팔도십이도」가 『송사』 권82에 전한다. 「팔도십이도」에 언급된 대성악의 음악적 특징 중의 하나는 정성제도와 중성제도이다. 1105년에 시행된 정성과 중성은 12율 4청성에 관련된 제도이다. 즉 정성에는 12율 외에 4청성이 배열되었고 중성에는 12율만 배열되었다. 송나라의 정성제도와 중성제도가 고려에서 수용된 실례는 편종과 편경의 율수, 즉 정성 16과 중성 12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정성과 중성이 고려의 태묘악장에도 나온다.
2) 대성아악의 수용 및 아악기와 악현
(1) 대성아악의 수용 경위
1114년 고려사신 안직숭은 송나라 휘종이 하사한 공후, 박판, 방향, 비파, 장고, 쟁, 적, 피리를 포함한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송나라의 신악기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예종은 하례사 왕자지와 문공미를 송나라에 파견하였다. 그 무렵 마침 대성부에서 제정한 아악기를 휘종이 고려사신에게 내려주었고, 왕자지와 문공미가 아악기를 가지고 귀국한 때가 1116년 6월이다. 그러므로 대성아악이 고려에 들어온 때는 1114년이 아니고 1116년이다.
대성아악의 수용과 관련된 『송사』 권82의 기록과 『동문선』에 전하는 임존의 글에 의하면, 예종이 하례사 왕자지 및 문공미와 더불어 습악인을 수행시켜서 대성악을 배우도록 하였으며, 대성아악을 교습할 수 있는 악보를 청하여 휘종의 허락을 받았다. 이렇듯 고려사신의 일행 중에서 습악인이 대성아악을 배웠고, 휘종이 내린 아악기와 더불어 악보 및 의물 일습을 받아 귀국함으로써, 대성아악의 역사가 고려에서 시작되었다.
(2) 아악기와 의물
왕자지와 문공미가 가지고 온 대성아악기는 사용처에 따라서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한 부류는 댓돌 아래의 뜰에 배열하는 헌가악기고, 다른 부류는 댓돌 위에 펼쳐놓는 등가악기다. 등가악기는 편종, 편경, 일현금, 삼현금, 오현금, 칠현금, 구현금, 슬, 지, 적, 소, 소생, 화생, 훈, 박부, 축, 어, 이상 17종이다. 헌가악기는 편종, 편경, 일현금, 삼현금, 오현금, 칠현금, 구현금, 슬, 지, 적, 소, 소생, 화생, 우생, 훈, 박부, 진고, 입고, 축, 어, 이상 20종이다.
등가의 편종과 편경은 12율 4청성의 정성 짜리 두 틀씩과 12율의 중성 짜리 두 틀씩 모두 네 틀이다. 헌가의 편종과 편경은 아홉 틀씩 해서 모두 열여덟틀이다. 등가와 헌가에 사용될 총 스물두 틀의 편종과 편경 및 20여종의 아악기는 많은 수량이고, 그 무게와 부피 또한 엄청났다. 이러한 아악기 외에도 문무와 무무를 위한 약, 적, 간, 과 등의 무구 및 제례의식용 의관, 무의, 악복 그리고 휘번 등과 같은 의물도 고려로 보냈다.
송나라의 휘종이 이렇게 많은 아악기와 제례용 의물을 고려조정에 보냈다는 사실은 고려음악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렇듯 고려로 하여금 요나라 및 금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멀리하고 오직 송나라와의 문화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바탕이 된 뇌물이 고려에 보낸 아악기와 의물이라는 의견은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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