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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음악사] 가야국의 음악문화

by 정적인 바둑이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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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의 주변을 거점으로 성장한 가야국은 신라보다 비옥한 땅을 지녔으므로, 가야국은 신라보다 먼저 가야금이라는 현악기를 창제할 수 있었다.

 

 <가야국의 음악문화>

 기원 전후 낙동강 주변에 위치하였던 변한의 열두 성읍국가에서 성장한 가야국은 6세기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까지 가야금이라는 대표적인 현악기를 창안함으로써, 고대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가야금에 관해서 『삼국사기』「악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획일화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고, 성열현 사람 악사 우륵에게 명령하여 열두 곡을 짓도록 하였다. 나중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에 현피 살도록 하고서 대나마 법지와 계고 그리고 대사 만덕을 보내서 그 업을 전수시켰다.

 이 세 사람들은 그의 열두 곡을 전수받고 난 뒤 서로 말하기를, "이 곡들은 번거롭고 음란하여 아담하고 바르다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줄여서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은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성을 냈으나, 마침내 그 다섯 곡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이르기를,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아니하며, 애처로우면서 슬프지 아니하니 바른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후에 그 악곡을 임금 앞에서 연주하였더니 왕이 듣고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 때 간신이 헌의하기를, "이 악곡들은 멸망한 가야국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하였더니, 왕이 가로되, "가야왕이 음란해서 자멸한 것이지 음악이 어찌 죄가 되겠느냐?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은 인정에 연유하되 준절케 하는 데 있거늘,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음악에 연유되지 않느니라"고 하면서, 드디어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가야금음악은 대악으로 발전되었다.

 가야금음악에는 두 악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이고 둘째는 눈죽조이며, 가야금악곡은 모두 185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열두 곡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이다. 이문이 지은 세 곡은 까마귀, 쥐, 메추라기이다.

 

1) 가야금의 유래와 악기구조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그 '당'은 시기적으로 보아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618~907)나라가 아니므로, 넓은 뜻의 중국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실왕이 중국의 쟁이나 슬을 참조해서 변진지역의 고대현악기를 개량한 악기가 가야금이었지, 가야금을 새로 창제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가실왕이 변진의 고대현악기를 개량하여 가야금을 만들 무렵인 6세기 이전부터 신라와 백제에도 고대현악기가 있었다. 대전 월평동 출토의 백제 8현금이나 신라토우에 보이는 양이두의 고대현악기가 있었다. 이렇듯 양이두 모양의 고대현악기가 가실왕이 가야금을 개량하기 이전부터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가실왕이 개량한 현악기는 예컨대, 가야금의 줄 수를 가령 8현에서 12현으로 늘린 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고대현악기를 가실왕이 개량한 가야금의 열두 줄은 12월의 12율을 상징한다. 6세기 이전부터 가야국이 중국과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실왕이 그런 음악적 상징을 감안하여 열두 줄로 개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개량한 가야금의 악기구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물이 일본천황의 어물을 보관한 정창원, 곧 쇼소인에 전하는 시라기고토이다.

 이 신라금의 구조는 현행 정악가야금, 풍류가야금, 법금처럼 양이두와 열두 줄, 그리고 열두 안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1천년이 넘도록 가야금의 악기구조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전승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2) 우륵의 사회적 지위와 그의 예술성

 가야국의 멸망이 가까워지자 악사 우륵이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을 때, 왕이 그를 국원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왕이 대나마 법지와 계고 및 대사 만덕, 이상의 세 관리를 우륵에게 보내어 가야국의 음악을 신라에 뿌리를 내리도록 조처하였다. 비록 우륵이 적국의 악사였지만 그를 신라에 정착하도록 배려한 진흥왕의 음악사적 업적은 6세기 이래로 가야금을 오늘까지 1천 4백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한반도에서 전승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데 있다.

 신라 17관등 중 제10관등인 대나마 법지와 계고 그리고 제12관등인 대사 만덕을 악사 우륵에게 보내 가야국의 음악을 배우도록 조처한 사실은 6세기 우륵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입증한다. 신라왕이 진골 출신의 제2관등인 이찬 윤흥을 남원으로 보내 귀금선생에게 거문고의 전통을 전승하도록 조처한 것도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8세기 무렵에도 높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3년(552)조의 기록에 의거하면, 우륵이 세 신라관리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가야금음악이 기악, 성악, 무용으로 구성된 악가무의 종합공연물이었음을 입증한다. 우륵이 악가무에 모두 능통한 악사였듯이, 예전의 전통예능인들은 대체로 악가무에 모두 능통하였다.

 

3) 우륵이 창작한 가야금의 열두 곡

 우륵이 가야금을 위해서 창작한 열두 곡은 상가라도, 하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상기물, 거열, 사팔혜, 이사, 사자기 이다. 이 열두 곡 중 아홉곡이 가야국 당시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지방명으로 밝혀졌다.

 하가라도는 경남 함안의 옛 지명이고, 상가라도는 경북 고령의 옛 지명이며, 달기는 경북 예천군 다인의 옛 지명이다. 물혜는 경남 함안군 이안의 옛 지명이고, 하기물과 상기물은 경북 금릉군 개령의 옛 지명이며, 거열은 경남 거창의 옛 지명이다. 그리고 사팔혜는 경남 합천군 초계의 옛 지명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경상남북도의 옛 지명으로 밝혀진 우륵의 가야금곡은 그 지방의 민요를 가야금으로 반주하도록 창작된 곡이었거나, 아니면 그 지방의 민요 곡조를 우륵이 가야금곡으로 편곡하였다고 추정된다. "지방마다 방언이 있듯이 음악을 획일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가실왕의 음악관을 충실히 반영시키기 위하여 우륵이 각 지방의 음악적 특성을 담아 가야금곡으로 편곡 또는 창작하였을지도 모른다.

 가야국의 여러 지방음악을 바탕으로 우륵이 창작한 가야금곡이 신라인에게는 번거롭고 음란하게 들렸기 때문에, 만덕, 법지, 계고가 우륵에게서 배운 가야금 음악을 아정한 음악으로 다듬어 열두 곡에서 다섯 곡으로 현곡하였다. 이렇게 신라인이 개작한 가야금곡은 우륵을 감동시킬 정도로 세련된 악곡이었으므로, 개작한 가야금곡은 신라왕과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 결국에는 대악이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가야금은 신라 삼현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만약 가야금이 신라에 수용되지 않았다면, 고대 일본조정에 신라금으로 소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이후 가야금이 1천년이 넘은 긴 세월 동안 향악기의 대표적인 현악기 구실을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가야금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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