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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음악사] 삼죽: 만파식적 해석 문제

by 정적인 바둑이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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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죽의 역사적 유래와 관련된 만파식적 설화는 삼죽의 기원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중요하다. 『삼국유사』 권2 소재의 만파식적 설화는 김부식이 괴이해서 못믿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상세하므로, 아래에 전부 인용한다.

 

 제31대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개요 원년(681)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니,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께서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산 위에 하나의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었고, 이튿날 점심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도 안정되었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를 받들어 바쳤다. 왕이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저를 만들어 연주하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렇게 값진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었다. 태자 이공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라고 물었더니, [태자가 가로되]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요"라고 청하였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므로, 그 못을 용연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저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저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693)에 부례랑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이라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보인다.

 

 만파식적 설화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국사학계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즉 성골계 왕통에 도전하여 진골계 왕통을 수립한 태종무열왕은 진골계 왕권을 정당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마무리지어야 할 신라 중대의 전제적 신문왕권이 강화되어야 하는 지배층의 숨은 정치적 목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만파식적 설화의 역사적 배경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신라 국보로 삼아 천존고에 보관한 만파식적이 성골시대 신라 상대의 삼보처럼 신라 중대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보물이라는 국사학계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만파식적 설화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국사학계의 견해에는 신라 삼죽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한 아무런 단서가 없다. 그리고 삼죽에 대한 김부식의 신라기원설은 신라 왕족의 후예인 그가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삼국사기』「악지」를 편찬하였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설득력이 약하다. 따라서 여러 고고학자료에 근거했을때,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고구려 및 백제의 횡적을 자국의 향악기로 수용하여 발전시킨 결과가 삼죽이라는 견해가 보다 타당하게 느껴진다.

 신라가 횡적을 수용시기가 대략 7세기 후반 무렵이었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자료는 감은사지에서 발굴된 청동제사리기(682)에 조각된 횡적이다. 그리고 만파식적을 거문고와 더불어 신기(神器)로 취급한 것은 진골계 왕권의 정당성을 위해서 신문왕(681~692) 이후 원성왕(785~798)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따라서 삼죽의 성립 연대는 신라 하대(780~935)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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