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신라의 삼현과 삼죽
통일신라의 향악은 삼현과 삼죽 및 박판과 대고, 그리고 가무였다고 『삼국사기』「악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라 음악은 삼죽, 삼현, 박판, 대고, 가무로 되었다. (중략) 삼현은 첫째 거문고, 둘째 가야금, 셋째 비파이고,
삼죽은 첫째 대금, 둘째 중금, 셋째 소금이다.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을 삼현이라고 하고, 삼죽은 대금, 중금, 소금을 뜻한다. 그리고 박판과 대고는 모두 타악기이고, 가무는 신라의 노래와 춤이다. 당속악에서 사용된 박판과 대고는 신라에 유입되어 궁중의 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가무는 삼국시대로부터 전승된 여러 지방의 가무이다.
(1) 삼현의 역사와 악곡
향비파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삼국사기』「악지」에 기록되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현악기 중 하나였던 5현비파인 향비파는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에 수용되면서 향비파로 불렸다. 5현비파를 『악학궤범』에서 향비파라고 명명한 까닭은 7세기 이래로 당나라에서 유입된 당비파와 명칭 상으로 구분짓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가야금은 삼현 가운데 가장 먼저 신라에 수용된 현악기이다. 가야국의 악사 우륵이 진흥왕때 신라에 투항하자 진흥왕이 우륵을 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법지, 계고, 만덕이라는 세 관리를 우륵에게 보내어 가야국의 악가무를 전수시켰다.
거문고는 가야금보다 늦은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 무렵에 신라에 뿌리를 내렸다. 신라 경덕왕때 사람인 옥보고가 거문고곡을 창작하였고, 옥보고의 제자 귀금선생이 금도를 안장과 청장에게 전승시켰다. 그리고 안장과 청장의 제자인 극상과 극종 때부터 거문고가 신라에 널리 퍼졌다.
삼현을 수용한 연대인 6세기 후반의 가야금과 7세기 무렵의 향비파, 9세기 초의 거문고를 감안할 때, 신라 삼현의 성립연대는 신라 하대쯤 일 것이다. 신라시대 삼현의 음악사적 의미는 백제와 고구려의 악기를 신라가 수용하여 후대에 전승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삼국사기』「악지」의 아래 인용문에 언급되었듯이, 삼현의 음악에 사용된 악조는 모두 일곱 가지이다. 즉 거문고의 평조와 우조, 가야금의 하림조와 눈죽조, 그리고 향비파의 궁조와 칠현조 및 봉황조가 그것이다.
거문고음악에는 두 악조가 있었으니, 첫째는 평조이고 둘째는 우조이며, 악곡은 모두 187곡이다.
(중략) 가야금음악에는 두 악조가 있었으니, 첫째는 하림조이고, 둘째는 눈죽조이며, 악곡은 모두 185곡이다.
(중략) 비파음악에는 세 악조가 있었으니, 첫째는 궁조이고, 둘째는 칠현조이며, 셋째는 봉황조이며, 악곡은 모두 212곡이다.
삼현 악조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는 따로 거론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삼현의 악조가 지니는 음악사적 의미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거문고와 가야금에 사용된 네 악조는 후대의 음악문헌에 보이므로, 향악의 음악적 특징과 관련된 악조이다. 그러나 향비파의 세 악조는 당악과 관련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봉황조는 일본에 전래된 비파음악의 반시키조, 다이시키조, 소조, 오시키조와 같은 당속악의 악조와 함께 사용된 당악조의 하나이다. 칠현조는 진나라의 죽림칠현과 관련된 당속악의 악조이다. 그리고 궁조는 중국음악의 5조 가운데 첫번째 선법명인 궁조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악학궤범』에 나오는 향악의 악조 중 하나인 탁목조의 별칭인 궁조로도 해석할 수 있다.
향악조의 하나로 궁조를 제외시킬지라도, 봉황조와 칠현조가 당속악의 악조라는 사실은 당악이 남북국시대 신라사회에 수용되었음을 입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삼현에 사용된 당악조는 당악이 향악과 함께 음성서에서 연주되었으며, 신라 악공들이 당악을 향악기로 연주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렇듯 향비파의 봉황조와 칠현조는 삼죽의 당악조처럼 당악이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사회에 수용되었음을 입증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삼현으로 연주한 총 584곡은 거문고의 187곡과 가야금의 185곡 및 향비파의 212곡을 합친 숫자이다. 이 584곡은 삼죽의 총 867곡보다 183곡이나 적은 숫자이다. 이 584곡의 성격이 모두 순수 기악곡인지 아니면, 성악곡의 반주곡과 무용의 반주곡을 포함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2) 삼죽의 역사와 악곡
삼죽이 신라에서 유래되었다고 『삼국사기』「악지」에 전하지만, 삼국시대의 음악사적 대세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부식의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백제의 횡적과 관련된 여러 고고학자료가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악지」의 기록을 인용한 뒤 살펴보려 한다.
삼죽도 또한 당적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향악의 삼죽도 또한 신라에서 기원되었으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신문왕때 동해 가운데 문득 하나의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 산 위에 한 간죽이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어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왕은 [사람을 시켜서 그 대나무를] 베어서
적을 만들도록 명하였으며, 그것을 만파식적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괴이하여 믿지 못하겠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악지」에서 삼죽의 신라기원설과 관련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원설의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 향비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 횡적의 불분명한 기원을 모두 신라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김부식의 생각은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역사의식에서 나온 그들에게 유리한 견해로 보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5세기에 이미 고구려에 수용된 횡적, 또는 그 이후의 백제 횡적을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이 삼죽이라는 해석이 고대음악사의 대세론 관점에서 보아 타당하다.
남북국시대의 대금, 중금, 소금의 음악에 사용된 악조 및 연주된 악곡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악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죽 (중략) 대금, 중금, 소금의 적에 쓰인 일곱 악조가 있으니,
그것은 첫째 평조, 둘째 황종조, 셋째 이아조, 넷째 월조, 다섯째 반섭조, 여섯째 출조, 일곱째 준조 이다.
대금 324곡, 중금 245곡, 소금 298곡이 있었다.
삼죽의 일곱 악조는 평조, 황종조, 이아조, 월조, 반섭조, 출조, 준조 이다. 그리고 삼죽의 악곡은 대금이 324곡, 중금이 245곡, 그리고 소금이 298곡이어서 모두 867곡이다. 삼죽의 일곱 악조와 867곡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삼죽 악조의 음악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삼죽의 일곱 악조 중에서 황종조와 월조 및 반섭조는 당속악 28조에 나오는 악조이다. 당악조가 삼죽에 사용된 사실은 통일신라의 당악이 음성서에서 향악과 함께 연주되었으며, 신라악공들이 향악기로 당악을 연주하였음을 의미한다. 삼죽에 사용된 당악조의 음악사적 의미는 삼현 중의 비파 악조처럼 남북국시대 당악이 통일신라사회에 수용되었음을 입증한다는 데 있다.
삼죽으로 연주한 총 867곡은 삼현의 총 584곡보다 183곡이나 많은 숫자이다. 다만 삼죽의 악곡이 삼현의 것보다 183곡이나 많다는 것은 당시 관악기가 현악기보다 더 많이 연주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관악기가 주로 궁중무용의 반주음악을 담당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신라 삼죽도 무용반주 때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삼현의 악곡 수보다 많은 삼죽의 183곡에는 무용반주곡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삼죽의 867곡 모두 무용반주곡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일부는 순수 기악곡이고, 일부는 성악 반주곡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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