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음악사] 상고사회의 고대악기(2)

정적인 바둑이 2022. 5. 1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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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회의 고대악기(2)>

2) 고조선의 공후인과 공후

 중국 진나라 최표의 『고금주』에 전하는 설화 중에 한역된 공후인이 있다. 이 공후인은 국문학계에서 흔히 공무도하가로 알려진 고대가요이다. 이 노래의 창작지역이 현재 중국 땅이기 때문에, 공후인이 중국작품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중국 직례성 조선현은 고조선 이래로 우리나라 조상의 독자적 문화양식을 유지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공무도하가의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므로, 학계에서는 이 노래를 우리의 고대가요로 취급한다.

 이 노래의 설화에서 백수광부의 뒤를 따라 물에 빠져 죽은 어느 여인의 애처로운 광경을 곽리자고가 보고 그의 아내 여옥에게 이야기를 해주자, 여옥이 그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를 지어 공후의 가락에 맞추어 노래불렀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에 나오는 여옥의 공후가 고대음악사적 관점에서 관심의 대상이다.

 발현악기인 공후라는 현악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악기분류법에 따라 사부악기 또는 현명악기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공후로는 수공후, 와공후, 대공후, 소공후가 있다. 그러나 근래 중국에서 발굴된 와공후와 관련된 여러 고고학자료에 의거하여 중국 음악학자들은 우리 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위진시대의 와공후라는 현악기의 특징은 첫째로 거문고의 고정괘처럼 붙박이괘가 몸통에 있고, 둘째로 연주자가 오른손으로 줄을 타고 왼손으로 괘를 짚고 연주하며, 셋째로 악기를 가로로 눕혀 위쪽을 무릎 위에 놓고 아래쪽을 땅바닥에 놓고 연주하는 점이다. 이런 와공후와 관련된 고고학자료로는 감숙성 주천 서구의 위진 M7묘, 감숙성 가욕관의 위진묘, 그리고 감숙성 정가갑 서량묘의 벽화 및 호북성 악주 칠리계 4호 진묘의 악용이 있다.

 고조선의 위치가 중국 북조의 감숙성이나 서량지역인 황하의 상류지방과 인접한 점을 감안하면, 여옥의 공후는 고정괘가 있고 연주법이나 악기 놓는법이 현행 거문고의 옛 형태로 보이는 와공후 계열의 현악기였다고 해석된다. 고조선시대에 이렇게 생긴 여옥의 공후는 4세기 무렵 고구려 왕산악이 진나라의 칠현금을 보고 개량하였다는 거문고의 전신과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3) 함경도 서포항 출토의 골제적

 한반도 고대사회의 관악기로 보이는 고고학자료의 악기는 『서포항원시유적발굴보고서』에 나오는 골제적이다. 이 골제적은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에서 출토되었다. 새 다리의 뼈로 만든 이 골제적의 길이는 13.5cm이고, 직경이 1cm인 작은 적이라고 보고되었다. 그런데 이 골제적의 왼쪽 부분이 파손되어서, 그것이 젓대처럼 가로로 잡고 부는 횡적의 일종인지, 아니면 단소처럼 세로로 잡고 부는 종적의 일종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이 골제적이 과연 실제로 연주된 관악기였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새 다리의 뼈로 만든 이 골제적의 길이가 아주 짧고 직경도 너무 좁거니와, 지공의 간격도 매우 가까워서 실제로 연주되었다고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골제적은 연주용 악기라고 보기 어렵고, 제사의식에서 사용된 의물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되려 설득력이 있다.

 이 골제적의 제작연대는 기원 전 2천년이라고 보고되었는데, 그것을 청동기인이었던 예맥족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신석기인이었던 고아시아족이 제작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상고사회에서 뼈로 만든 관악기가 있었지만, 그 골제적이 실제로 연주용 악기였는지 또는 제천의식에서 사용된 의물의 일종이었는지는 앞으로 새로운 고고학자료에 의하여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4) 신창동 출토의 고대현악기

 1990년대에는 고대현악기와 관련된 고고학자료가 세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첫째는 대전광역시 월평동이고, 둘째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이며, 셋째는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이다.

 1994년 8월부터 1995년 6월까지 국립공주박물관과 충남대박물관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월평동 유적지에서 고대현악기의 일부분인 양이두만이 출토되었는데, 이 양이두의 제작시기는 대략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1997년 7월 하순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기로 추정되는 실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지의 현악기는 기원 전 1세기 무렵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였다. 한편 1997년 3월 임당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현악기의 연대는 서기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되었다. 이 현악기의 길이는 76cm이고, 폭은 27cm라는 사실만이 알려졌다. 여기서는 기원 전으로 추정된 신창동의 고대현악기만을 다루고, 기원 후로 밝혀진 임당동과 월평동의 유물은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고고학계에 발표된 신창동 현악기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보고되었다.

 

 반파된 신창동 현악기의 길이는 77.2cm이고, 너비는 28.2cm이다. 머리 부분에 6~7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줄을 꿰어맬 수 있도록 되었으며, 꼬리 부분에 평면 역삼각형의 돌출부를 만들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줄 고정부를 결합하도록 되었다. 남아 있는 줄 구멍은 여섯 개이지만, 원래는 10개 또는 12개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내부는 2cm 정도의 깊이로 안쪽이 패어졌는데, 중앙부가 약간 솟아 있는 요자형을 이루었다.

 

 신창동의 현악기를 현행 가야금과 비교하면, 그 현악기의 길이는 절반 정도이고, 너비는 서로가 비슷하다. 반파된 신창동 현악기의 줄 구멍이 여섯개이므로, 원래의 구멍은 그 두 배인 10개 또는 12개로 추정되었다. 꼬리 부분의 역삼각형 돌출부에 큰 구멍이 있으므로, 그 구멍에 별도로 결합한 양이두 형태의 결구가 있었다고 보았다. 다만 결구의 모양이 반드시 양이두 형태였다고 고집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양이두 부분이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창동의 고대현악기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첫째로 오늘날 경상도지역 변진 땅에 기원 전 현악기 관련의 문헌기록이 있지만 전라도지역의 마한 땅에 고대현악기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단서는 신창동의 유물이라는 데 있다. 둘째로 고대현악기를 포함한 신창동유물의 연대가 기원 전 1세기 무렵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현존 최고의 고대현악기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셋째로 신창동의 고대 현악기가 삼국시대 백제의 독자적 현악기였다는 백제금의 모체였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가능하도록 만든 근거라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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