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음악사] 정악의 출현과 성장

정적인 바둑이 2022. 6. 6. 22:20
반응형

<풍류방의 음악문화와 정악>

  조선후기 풍류방의 음악문화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정악이 만들어지는 토대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 풍류방의 음악문화는 연주 형태에 따라서 성악과 기악으로 구분된다. 성악의 대표적인 갈래는 가곡, 시조 그리고 가사이다. 이 세 갈래를 모아 정가라고 부른다. 풍류방의 음악문화와 관련된 기악의 대표적인 갈래는 줄풍류로 알려진 영산회상이 있다. 줄풍류는 거문고 중심의 악기편성으로 연주되었기때문에 줄풍류를 거문고회상 또는 현악영산회상이라고도 부른다. 줄풍류의 아명은 중광지곡이라 부른다.

 

1) 조선후기의 중인과 풍류방

(1) 17~18세기 가객의 신분 계층

 양란 이후에 나타난 조선사회의 다양한 변화 중 하나는 17세기부터 형성된 중인계층의 출현이다. 이와 같이 조선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원인은 화폐유통과 상품경제에 의한 서울의 도시화 및 신분 계층의 변동, 그리고 농업 발달로 인한 부농의 출현, 천주교의 전래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사회의 신분 변동에 따라 중인 계층이 출현하였고 성장한 것은 18세기의 예술활동 및 19세기의 개화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중인 계층의 성장은 화폐유통과 상품경제에 따른 부의 축적과 맞물려 조선후기 예술의 새로운 문화수용층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중인 계층의 등장은 이전까지 관 주도의 음악문화를 민간 주도로 바꾸게 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중인 계층은 중앙관아 소속 기술직 하급 관원 및 지방에 거주하던 서얼, 향리, 교생 등으로 구성되었다. 즉 사역원, 전의감, 관상감, 내수사, 혜민서, 도화서, 장악원 같은 중앙관아 소속 기술직의 하급 벼슬아치 및 의관이나 역관이 중인 계층에 해당된다. 그리고 양반의 첩자인 서얼이나 실무 행정을 담당한 하급 말단직의 서리와 아전의 이서 및 경아전의 녹사와 서리, 그리고 외아전의 향리가 조선사회의 중인 계층을 형성하였다.

 

* 17세기의 가객

 이 시기의 대표적인 풍류객은 17세기 전기에는 송경운 그리고 17세기 후기에는 김성기와 허정 등이 있다. 이기발의 『서귀유고』에서 전주 출신인 비파명인 송경운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전주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곡조보다는 그 당시의 새로운 곡조를 비파로 연주하기 좋아하였다고 하며, 송경운은 당시의 선비나 천인을 가리지 않고 청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비파를 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송경운이 비파로 어떤 곡을 연주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율객 김성기에 대한 정래교의 『완암집』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성기전 금사 김성기는 원래 상방궁인이다. 성격이 음률을 좋아하여 작업장에 나가 바치 일은 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서 거문고를 배웠다. 그 정교한 기법을 터득하고 나서 드디어 활을 버리고 거문고를 전공하게 되었다. 후일 솜씨 좋은 악공들은 다 그 및에서 나왔다. 한편으로 퉁소와 비파도 다루었는데, 그 묘한 것이 극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직접 신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악보를 익혀 이름을 얻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서울에 김성기의 새 악보가 유행하였다.

 

 김성기는 원래 거문고명인이지만 퉁소와 비파에도 능했다. 김성기의 일화는 정래교의 『완암집』, 남유용의 『뇌연집』, 이영유의 『운소만고』,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이경민의 『희조일사』, 그리고 장지연의 『일사유사』에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숙종 말 금사 김성기는 궁중의 의복과 비품을 관장한 상의원에서 활을 만드는 궁인이었지만, 그는 거문고를 좋아하여 명인으로 거듭난 풍류객이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에서 여항 6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 김성기는 김천택의 가곡을 거문고로 반주한 단짝의 율객이었다. 김성기의 거문고가락은 그의 제자가 엮은 『어은보』에 전한다.

 주씨본 『해동가요』 소재 「고금창가제씨」에 수록된 56명 중 제일 먼저 나오는 허정은 1651년 별시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성천부사와 승지를 역임한 양반 출신의 관리였다. 중인 출신의 역관으로 북경을 다녀와 지사까지 지낸 장현은 『청구영언』의 여항 6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복시의 서리를 지낸 중인 출신의 탁주한은 여항인의 시집인 『소대풍요』에 한시를 남긴 가객으로 유명하다.

 

 * 18세기의 가객

 주씨본 『해동가요』 소재 「고금창가제씨」의 56명 대부분은 김천택 중심의 경정산가단 및 김수장 중심의 노가재가단과 관련을 맺고 영조때 풍류활동을 전개한 가객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풍류활동을 통해서 18세기 조선사회의 신분 계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여항시인으로 『풍요속선』에 한시를 남긴 김유기는 지방에서 가곡활동을 펼치면서 제자를 기른 가객이다. 자신의 고향 남원에서는 물론이고 대구와 경산 및 밀양에서 가곡활동을 전개한 김유기는 1715년 대구로 내려와 한유신과 같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가곡 발전에 이바지하다가 1718년 밀양의 영남루 객관에서 사망하였다. 영조 때 대구와 경산에 거주한 김유기의 제자 한유신은 가곡의 가창과 창작 및 전승에 이바지한 영남 출신의 시인이자 가객이다. 한유신의 경우로 보았을 때, 18세기의 가곡은 서울 이외의 지방 풍류방에서도 애창된 성악의 한 갈래였다는 것이다.

 가객 박상건의 아들 박후웅은 가곡 중 소용을 지어서 부른 가객으로 유명하다. 가객 김정희의 아들로 음악성이 뛰어난 김중설은 경정산가단에서 활약한 가객이었고, 또한 김성기로부터 거문고와 퉁소를 배운 율객이다. 박상건의 제자 김우규는 『청구가요』에 작품을 남긴 시인이다. 그리고 영조 때 서리 출신의 명필로서 6편의 작품을 남긴 김묵수는 『청구가요』 등의 문헌에 선가로 알려진 가객이다. 위에 언급된 가객을 포함한 『해동가요』의 「고금창가제씨」에 기재된 56명의 가객 모두가 18세기 가곡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비록 중인은 양반처럼 높은 관직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조선후기 경제계의 상권을 쥐고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한 생활을 영위한 사회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생활이 윤택한 중인들은 당시의 풍류활동을 통하여 서울의 음악수용층을 형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부유한 중인 출신의 풍류객들은 시사나 가단을 만들어 조선후기 음악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중인 출신의 율객들은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였으며, 악공과 어울려 악회를 만들어 풍류를 즐겼다는 내용이 성대중의 『청성집』에 전한다.

 18세기의 풍류객으로는 유춘오악회에 참여한 홍대용, 홍경성, 이한진, 김억 등이 있다. 시사나 가단 또는 악회라는 풍류방에서 연주된 음악이 오늘날의 이른바 정악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