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 조선전기의 향악
<조선전기의 향악기와 향악곡>
1) 궁중음악의 향악기
고려의 향악을 전승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 건국초기 향악은 고려의 향악기도 세종 초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사실은 1430년(세종12) 3월 악공취재와 관련하여 악학이 의례상정소에 올린 글을 근거로 세종대왕에게 상소한 다음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 12년 3월 무오) 의례상정소에서 여러 학의 취재에 있어 경서와 여러 기예의 수목에 대하여 아뢰기를,
(중략) 악학은 (중략)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젓대, 장고, 해금, 당비파, 향피리, 이상은 향악이요.
1430년 당시 향악에 사용된 악기는 비파, 거문고, 가야금, 젓대, 장고, 해금, 당비파, 향피리, 이상 여덟 가지였다. 세종 때의 여덟 악기를 『고려사』「악지」의 향악기와 비교하면, 당비파를 제외한 향비파, 거문고, 가야금, 젓대, 장고, 해금, 향피리 이상의 일곱 가지가 일치한다.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고려 때까지 전승된 삼현(거문고, 가야금, 향비파)의 전통이 조선초기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고려사』「악지」에 의하면, 당비파는 당악기의 하나로 당악연주에 사용되었지만, 세종 때에는 당비파가 향악연주에도 사용되었다. 『고려사』「악지」의 향악기에 포함된 중금과 소금이 위의 인용문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젓대 연주자가 중금, 소금을 함께 연주할 수 있으므로, 따로 넣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듯하다. 『악학궤범』 권7의 대금조에 중금, 소금의 연주법이나 악보가 대금과 같다는 설명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무튼 삼현처럼 삼죽의 전통도 조선전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렇듯 세종조의 향악에 사용된 악기는 당비파를 제외하였을때, 고려의 향악기를 거의 그대로 전승하였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세종 때까지 전승된 향악기 중에서 장고, 해금, 당비파는 『악학궤범』(1493)의 향부악기에서 제외되었다. 그 대신에 『악학궤범』에 의하면, 세개의 악기를 세종 때의 향악기에는 없던 소관자와 초적이 향부악기에 포함했다. 목동들이 불었던 소관자는 가로로 잡고 부는 횡적의 일종으로 소관자에는 취구 하나와 지공 셋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초적에는 잎사귀를 입술에 대고 부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특히 초적은 민간에서 연주되던 것을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향부악기의 하나로 『악학궤범』에 정리하였다.
정리해보면, 조선전기의 향악기는 고려 향악기를 전승한 바탕 위에 새로 첨가한 두개의 향악기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런 향악기 중에서 뼈대를 이루는 삼현과 삼죽의 전통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조선전기까지 지속된 것은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현행 궁중음악의 중요한 향악기인 거문고, 가야금, 젓대, 향피리의 뿌리가 조선전기 삼현과 삼죽의 전통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조선전기의 향악곡
조선전기 향악곡을 전하는 고악보로는 『세종실록악보』, 『대악후보』, 『시용향악보』, 『금합자보』가 있다. 향악곡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고려의 향악곡이고, 둘째는 조선초기에 창제된 향악곡이다.
첫째 갈래에 해당되는 향악곡은 동동, 귀호곡, 만전춘, 사모곡, 북전, 상저가, 야심사, 생가요량, 서경별곡, 유구곡, 유림가, 이상곡, 자하동, 정석가, 정읍, 진작, 청산별곡, 풍입송, 한림별곡, 이상 열아홉 곡이다.
고려 향악곡의 곡조가 선초 신악창제때 차용되었으며 이는 조선전기 향악곡의 절반을 차지한다. 예컨대, 청산별곡과 서경별곡의 곡조는 납씨가와 정동방곡의 창제때 차용되었고, 풍입송 곡조의 일부가 유황곡 및 보태평 중 융화의 창제때 차용되었으며, 만전춘 곡조의 일부가 정대업 중 혁정의 창제때 차용되었다. 오늘날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의 융화와 혁정에 고려 향악곡의 곡조 일부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둘째로 선초에 창작된 향악곡은 납씨가, 봉황음, 여민락, 취풍형, 치화평, 이상 다섯 곡이다. 이 다섯 곡 중에서 납씨가는 청산별곡의 선율을 차용하여 창작된 악곡이다. 봉황음, 여민락, 취풍형, 치화평은 모두 용비어천가와 관련된 창작곡이다.
조선후기까지 전승된 향악곡은 감군은, 만대엽, 여민락, 영산회상, 이상 네 곡이다. 감군은을 제외한 세 향악곡은 모두 현행 전통곡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었다.
『대악후보』 권6에 있는 영산회상은 본래 '영산회상불보살'의 가사가 있던 불교와 관련된 불가였다. 이와 같이 일곱 글자의 가사로 된 영산회상은 향악정재인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공연때 여기가 창사로 노래부른다고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여기가 '영산회상불보살'을 제창하며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도는 모습은 마치 승려가 불공하는 모습을 모방한 것 같다고 성현이 『용재총화』 권1에 서술하였다. 이처럼 영산회상은 당시의 본사찬, 관음찬, 미타찬과 같이 불가의 일종이었다.
한편 『악학궤범』 권5를 보면 영산회상은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도 연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불교 성악곡인 영산회상의 가사는 중종때 수만년사로 개작되며 세속화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후기에는 영산회상의 가사가 완전히 삭제되었고, 이로 인해 영산회상은 순수한 기악곡이 되었다.
『대악후보』 권6 및 『금합자보』에 전하는 만대엽은 중대엽, 삭대엽과 함께 현행 가곡의 모체로 알려진 조선전기의 성악곡이다. 『양금신보』의 「현금향부」에서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은 고려가요 정과정의 삼기곡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만대엽의 음악형식이 고려 향악곡의 어떤 형식과 관련되었는지에 대한 것은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금합자보』에서 살펴볼 수 있는 만대엽의 음악형식은 아래에 제시하였듯이 현행 가곡처럼 5장 및 중여음과 대여음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만대엽의 가사는 무가 계통의 심방곡과 관련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양금신보』 소재 중대엽의 별칭을 심방곡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향악기가 거의 그대로 조선초기에 사용되었듯이, 조선초기의 향악곡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종조에 창제된 신악 중에 여민락, 보태평, 정대업, 봉황음과 같은 새로운 향악곡이 고려의 향악곡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경국대전』 권3의 「예전」에 규정된 향악의 악공취재를 위한 시험곡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국대전』 소재의 향악곡은 삼진작, 여민락령, 여민락만, 진작 사기, 이상곡, 오관산, 자하동, 동동, 낙양춘, 보태평, 정대업, 진찬악 풍안곡, 전인자, 후인자, 정동방곡, 봉황음 삼기, 한림별곡, 환궁악, 북전, 만전춘, 취풍형, 치화평 삼기, 유황곡, 정읍 이기, 정과정 삼기, 금전악, 납씨가, 헌선도, 유림가, 횡살문, 성수무강, 보허자, 이상 33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