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음악사] 향악의 전성시대 개요

정적인 바둑이 2022. 5. 13.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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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시대인 고대후기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정치적으로 대치함으로써 한반도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통일신라에는 당악기와 당악조가 한반도에 등장하여 당악이라는 새 물줄기를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악지」와 고고학자료에 보이는 당비파, 당피리, 박판 등의 당악기가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새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당속악 28조 중에서 황종조, 반섭조, 월조와 같은 당악조가 향악기에 사용된 것도 통일신라에 당악이 유입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고대후기의 당악이 한반도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지만, 그 갈래가 고대후기의 향악과 동등할 수는 없었다.

 

 둘째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한 발해의 음악과 한반도의 남쪽 통일신라의 음악이 오늘날처럼 남북국시대의 음악사를 전개시켰다는 점이다. 진감선사가 신라에 전한 당풍 범패나 거문고를 위한 옥보고의 창작곡은 첫째시대와 다른 음악문화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사회에 범패의 등장 및 전문연주가와 창작곡의 출현도 둘째시대의 특징이다.

 

 고대사회 악사의 사회적 지위는 중세사회보다 높았다. 왕산악은 고구려의 재상이었고, 가야국의 악사 우륵은 신라 17관등 중 제10관등인 대나마 법지와 계고 및 제12관등인 대사 만덕에게 노래와 춤 그리고 가야금을 가르쳤다. 통일신라사회 육두품 출신의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 및 그의 제자 귀금선생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옥보고의 금도를 전수할 때, 신라 왕족 출신의 제2관등인 이찬 윤흥이 지리산에 은거하던 귀금선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린 사실을 보면,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고대사회에서 높았다.

 

 만주의 거란족에게 멸망 당한 발해의 음악문화는 후대에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와 일본 역사서에 산견되는 발해악과 관련된 단편적인 사료는 발해의 음악문화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일본 왕립음악기관의 고마가쿠가 9세기의 악제개혁 이후 비록 일본화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9세기 이전의 고마가쿠는 발해악과 더불어 남북국시대의 음악사 서술에서 결코 제외시킬 수 없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음악문화이다.

 

 고대후기 통일신라의 향악에 사용된 삼현과 삼죽은 고대전기 고구려와 백제의 향악기와 역사적으로 관련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삼현과 삼죽은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향악기를 신라에서 수용하여 새롭게 발전시킨 결과이다. 고대후기의 삼현과 삼죽은 중세음악사에서도 향악의 전승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여섯 향악기였기 때문에,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악이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악은 당시의 향악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의 향악은 고대후기 음악사의 대세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킨 궁중음악의 핵심 갈래였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하였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북쪽을 다스렸던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발해(699~926)는 한반도를 통일한 통일신라(676~935)와 더불어 두 세기가 넘도록 한국사의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은 남북국시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신라 왕통의 전환에 따른 왕권의 전제화가 정치적 변화양상으로 두드러진다.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계 왕통은 완전히 끊겼고, 태종무열왕부터 시작된 진골계 왕권의 전제화가 신라역사의 정치적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 즉 신라의 골품제사회에서 육두품 귀족의 정치세력이 상대적으로 부각된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이 시기 군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숭배한 불교를 자장, 의상, 원측, 혜초, 원효 등의 고승이 신라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하여 봉덕사 및 상원사의 범종 등을 포함한 불교 문화의 꽃이 남북국시대에 만발하였다. 한편 682년(신문왕 2)에 설립된 국학에서 교육을 받은 육두품 출신의 자제들은 유교가 신라사회에 뿌리내리도록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설총과 강수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시대 신라 향악의 터전 위에 백제와 고구려의 음악문화를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음악문화로 발전시켰다. 두 나라의 향악기를 수용하여 이룩한 삼현과 삼죽이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여섯 향악기이다. 육두품 출신의 옥보고는 8세기 고구려의 거문고를 신라에 뿌리내리는 데 공헌하였다. 결과적으로 거문고는 가야금과 향비파와 더불어 통일신라의 삼현이 되었다. 삼죽은 백제와 고구려의 횡적을 신라사회에서 수용하여 발전시킨 대금, 중금, 소금이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다른 음악양상은 당나라에서 유입된 당풍 범패는 삼국시대 신라의 향풍 범패와 더불어 불교음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시대 신라는 진흥왕때 우륵의 가야금을 수용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악기는 백제악기나 고구려악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영성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고구려악기와 백제악기를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하였고, 따라서 남북국시대의 음악사를 한반도에서 주도적으로 전개시켰다. 백제악기와 고구려악기를 수용한 것에 더하여 발전시킨 통일신라의 삼현과 삼죽이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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